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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산 '정조'의 의문의 죽음....
작성자 허브누리 (ip:)
  • 작성일 2007-11-13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911
평점 0점

 바야흐로 정조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200여 년 전 갑작스레 죽음을 맞은 조선의 왕은 서점에서,
TV 화면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답니다.

사람들은 그의 시련에 얼굴을 찡그리고, 그의 적들에
분노하며, 그에게 닥쳤던 갑작스러운 죽음에 가슴 아파
하는 등 사람들은 '정조'에 환호하고 있답니다.

정조는 조선 왕조 제 22대 왕(재위 1776~1800)으로
이름은 이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 장련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이며, 비는 호의 왕후 김씨랍니다.

1759년(영조35)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영조38)
11세 때 생부 사도세자가 비명으로 세상을 떠나자

일찍 요절한 백부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되어 제왕
수업을 받게 된답니다.

1775년(영조51) 12월 82세의 노쇠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맡아 국정을 수행하다 이듬해 영조가 승하하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1762년 2월 좌참찬 김시묵(金時?)의 딸 효의왕후를 비로
맞아들이는데,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역시 세손시절부터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홍국영(洪國榮)의 도움을 받으며

철저히 내명을 숨기며 살다 왕위에 오르자 왕권을 위협하는
환척(宦戚)과 노론벽파(老論碧波) 일당을 숙청하면서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 및 발전시켜나간답니다.

또한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여러 갈래의 학문을
수용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문예부흥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해 나가며,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다양한 정치 세력들을 통합하고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이른바 우리나라의 르네상스기를
주도하며 현군(賢君)이자 18세기 ‘왕조 중흥의 영주’로써
찬란한 업적을 남긴답니다.

그러나 당파 싸움의 희생양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정조는 아버지의 역적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늘 위협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는데...

세손 시절, 어린 정조의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존현각 일기>에는 노론에게 당한 노골적인 협박,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으로 인해 옷을 벗고
잠들지 못하는 불안함, 그리고 궁녀와 내시까지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박함이 드러나 있답니다.

1795년, 정조는 3천 여명의 장용영 군사를 포함한
6천 여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화성을 향했는데..

여전히 노론 세력이 우세한 서울을 떠나 화성에서 새로운
조선을 일으키고 싶었던 정조!

그는 갑옷을 입고 밤낮으로 군사훈련을 벌였는데 이는 바로
노론을 향한 무력시위 였답니다. 
 
노론 신하들은 정조의 행보에 치를 떨며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고, 심지어 혈서를 쓰기까지 했는데...

정조와 노론의 대립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무렵,
정조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답니다.

정조가 죽던 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으며
양주와 장단 등의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가 하얗게
말라 죽었다고 역사가들은 전하고 있답니다.

정조는 몸에 난 종기가 원인이 되어 1800년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서거했다고 하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의혹과
의문이 줄을 잇고 있답니다.

의혹의 배경에는 노론이 권한 치료제가 상처를 더욱 악화
시켰다는 점, 사망 전 28일 동안 곁에서 그를 보살폈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아버지가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선
인물이었다는 점,

정조 사망 이후 정순왕후 계획 하에 노론의 세상의
되었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거론된답니다.

그러나 개혁군주 정조대왕이 갑작스레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후 조선은 국운이 다한 듯, 쇠퇴해가다가 칼 한번
뽑아보지 못하고 외세에 나라를 내주고 만답니다.

사실 정조의 독살설 외에도 정조는 즉위 초 조선 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자객 습격사건을 겪는데,

평소 암살이나 자객의 침입을 우려 책을 읽으면 날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던 정조의 습관이 아니 였다면 정조는 자객의 손에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답니다.

그날 밤도 자객의 침범을 정조 스스로가 알아채고 대비하였기
때문이랍니다. 궁녀, 내시, 호위무관이 연계된 이 암살사건을
바라볼 때 정조는 즉위 초부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늘 자유롭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답니다.

정조 앞에서 웃음을 띠고 충성을 다짐하는 상당수가 속으로는
칼을 품고 있던 적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암살사건의 배후에는 정조의 할머니 즉 영조의 부인이
개입되었다는 정황적 증거가 있었답니다.

정조가 이처럼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늘 자유롭지 배경에는
세종대왕이 비견될 만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정조였지만
그는 단지 아버지를 잘못 만났다는 점인데...

세종은 태종을 아버지로 두어 후일 근심거리나 그의 통치를
방해할 모든 것을 아버지가 스스로 손에 피를 묻혀가며
처리해주었지만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둔 정조는 목숨까지 위협당하는 짐만
물려받았기 때문에 항상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답니다.

 

허브누리(www.herbnuri.co.kr) &(주)지식을다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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