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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테러에 시달린
작성자 1111 (ip:)
  • 작성일 2009-08-07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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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우익으로부터는 공산주의자, 좌익으로부터는 우경
기회주의자로 공격 받다가 결국 테러로 숨을 거둔 독립운동가...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몽양 여운형 선생'입니다.

여운형은 20세기 한국 정치사를 통틀어 남과 북에서 동시에
존중을 받고있는 드문 정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랍니다.

한현우라는 테러리스트의 총탄이 초래한 그의 죽음을 불러
왔지만, 그의 사후의 행복은 찬란한데...

그렇다고는 해도 분단 이후 몽양에 대한 평가가 남북 양쪽에서
같은 수준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답니다.

북쪽에서야 민족 노선에 입각한 그의 좌우 합작운동이 꽤
평가 받을 소지가 있었지만,

반공주의가 정치권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에 깊숙이 뿌리내린
남쪽에서 몽양의 ‘용공’ 행적은 오래도록 백안시 돼 왔는데..

서울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자발적인 사회장으로 애도했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여운형이라는 이름은 대놓고 비판하기에는
그 업적이 너무 뚜렷하지만,

그러나 선양하기 위해선 아주 많은 용기가 필요한, 그래서 아예
거론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 이름으로 남아 있었답니다.

그 침묵을 깨고 몽양을 일제 시대와 해방기의 탁월한 지도자로
부각시킨 것은 1979년 한길사에서 나온 ‘해방전후사의 인식’으로

그 뒤 시인 이기형씨가 실천문학사에서 낸 ‘몽양 여운형’(1984)을
거쳐 한울 출판사에서 나온 ‘몽양 여운형 전집’(1992~1994)에
이르러 이 거인의 모습은 남한 사람들에게 그 전모를 드러냈답니다.

그러나 여운형 선생은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테러에 시달린 정치인인데..

기록된 것만 따져도 그는 광복 직후부터 1947년 7월까지 모두
열 두 차례의 테러에 시달렸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가 분명한 좌익도 우익도 아닌 자리에서
좌우 합작을 꾀했기 때문이었답니다.

이승만도 박헌영도 그를 미워했으며 일제 잔재가 여전했던 당시
경찰은 그의 암살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혐의가 있답니다.

처음 곤봉으로 시작된 테러는 권총 폭탄으로 이어졌으며 범위도
그의 자택과 식구들로 넓어졌으며 한 번은 그의 방 전체가 날아간
적도 있었답니다.

가장 심각한 테러는 1946년 7월에 벌어졌는데, 그 무렵 그는
밤마다 숙소를 바꾸고 있었지만 그의 동향을 훤히 파악하는
세력이 있었답니다.

그는 서울 신당동에 있는 미군 중위 집에서 저녁에 비밀회담을
마치고 나오다 권총을 소지한 청년들에게 납치됐는데,

괴한들은 그에게 민족에게 죄를 지었다는 내용의 유서를 쓰게
한 뒤 학교 뒷산에서 그의 목을 졸랐답니다.

눈이 가려지고 두 다리가 결박된 상태였지만 어린 시절
태껸을 배웠던 그는 눈가리개를 가까스로 내린 뒤 절벽에
가까운 비탈길로 몸을 던졌으며 낙법으로 살아난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1947년 7월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데....

당시 그는 경호원들과 7인승 리무진에 타고 있었는데, 괴한들이
차량 뒤편 유리창 쪽으로 저격했답니다.

그가 차 안에서 쓰러지면서 남긴 마지막 말에는 ‘하나가 된 조국’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조선이다….”

허브누리(www.herbnuri.co.kr) &(주)지식을 다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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