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학적으로 금가락지가 떨어지는 땅이라는, 명당 중의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집이 있는데....
오늘의 주인공은 "운조루"입니다.
운조루는 영조 52년, 1776년에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난 유이주(柳爾胄)라는 사람이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해발 1506m의 지리산 노고단이 형제 봉을 타고 내려오다가 섬진강 줄기와 만나 만들어낸 넓은 평야, 즉 '구만들'이라고 불리는 이 들판을 금가락지처럼 꼬옥 끼고 있답니다.
바로 이곳이 예로부터 풍수지리학을 오래 공부했던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기록에만 나온다는 그 '금환락지' 땅이랍니다.
그 당시 유이주는 이 명당의 배꼽에 99칸의 기와집을 짓고 그 일가들이 모두 모여 살게 했는데...
그 때 유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 땅을 아껴 두었던 것으로 비! 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며 몹시 기뻐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답니다.
운조루라는 이름은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 혹은 '구름 위를 노니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그런 뜻인데요.
운조루의 운(雲)과 조(鳥)는 중국 도연명이 지은 시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의 첫 머리인 글자인 구름과 새에서 딴 것이라고 한답니다.
운조루는 모두 55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분되어 있다. T자 모양의 사랑채는 다락처럼 높은 마루를 달고 있답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가는 마루에 큰 부엌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높다란 마루가 있어 사랑채의 살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답니다.
지금도 운조루에는 유이주의 10대손이 살림을 살면서 관리를 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그 당시의 살림살이를 엿 볼 수 있는 생활용품과 집기, 도구 등은 물론 매매계약서, 후손들의 일기,
결혼 및 장례 비용에 대한 기록, 조문객의 명? ? 일제 때의 세금교부서와 영수증 등 희귀한 옛날 문서도 제법 많이 ? 린?BR>되어 있다고 한답니다.
그런데 이 집은 명당이라는 특징 말고도 다른 일반 집에서 발견할 수 없는 아주 특이한 점이 있는데...
99간의 대저택이었던 이곳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 지점에 곳간 채가 있고, 그 곳간 채에 지금도 쌀 뒤주가 하나 놓여져 있는데, 둥그런 통나무의 속을 비워 내고 만든 뒤주라서 네모지지 않고 둥그런 원목의 모습을 하고 있답니다.
이 뒤주의 특이한 장치는 하단부에 가로 5cm 세로 10cm 정도의 조그만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다가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새겨놓았는데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는 뜻이랍니다.
그러니까 이 뒤주는 누구라도 와서 쌀을 마음대로 퍼갈 수 있는 뒤주인 것이랍니다. 류씨 집안에서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풀기 위한 용도의 뒤주였답니다.
곳간 채에 설치한 쌀 뒤주는 주인의 얼굴을 직접 대면 하지 않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쌀을 가져갈 수가 있는데,
아름다운 마음씨는 이렇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법이랍니다.! 그런데 이 집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데....
운조루에 남아 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의 또 한가지 유물은 굴뚝이랍니다. 이 집은 다른 집에 비해서 굴뚝이 아주 낮게 설치되어 있는데 1m 높이도 안된 답니다.
건축적으로 볼 때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술술 잘 빠지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낮게 설치한 이유는 밥하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하는데...
쫄쫄 밥을 굶고 있는 사람들이 부잣집에서 펑펑 올라가는 굴뚝 연기를 보면 자연히 증오와 질투가 생길 수 밖에 없답니다.
동학과, 여순반란사건, 6.25 의 한 가운데인 지리산에 있었으면서도 운조루가 불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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