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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재떨이로 탄생한 경부고속도로?
작성자 허브누리 (ip:)
  • 작성일 2010-07-08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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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7월 7일은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되는
역사적인 날인데....

"우리나라의 발전과 후손의 번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인 만큼
우리의 힘으로, 우리 기술로, 우리 노력으로 빠른 시일내에 완공해
산업화의 주춧돌이 되게 하겠다.”

1968년 2월 동장군의 기세가 꺾이지 않은 날씨에 열린 서울∼부산
고속도로 착공 기공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같이 말했답니다.

그 후 40년, 박 전 대통령의 말대로 경부고속도로는 한강의 기적을
만든 국토의 대동맥으로 자리 잡았답니다.

1968년 당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142달러의 후진국이었는데...

국가예산의 23.6%인 429억7300만 원을 투입하는 단군 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극심했답니다.

야당과 학계에서는 자동차 등록대수 5만 대에 불과한 나라에서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고속도로 사업을 밀어붙이는 것을 비유해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 나라 경제발전을 위해 경부고속도로를
만드는데, 뭐? 야당이 반대한다고 국회에서 통과를 못 시켜?”라고
소리를 지른 뒤 재떨이를 집어던졌고,

김종필 민주공화당 당의장(당대표)쪽으로 날아갔답니다.

동석했던 이효상 국회의장, 이만섭 의원 등 모두 깜짝 놀랐으나
박 대통령은 “이 나라 경제를 살리려고 산업도로를 만드는데,
여당은 뭐 하는 것들이야!”라고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는데...

여권은 휘발유 가격을 100% 인상, 상당 부분을 고속도로
건설비에 투자하기 위해 석유류 세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했고,

야당인 신민당은 원내총무인 김영삼 의원의 지휘로 필리버스터를
벌이다 오후 6시40분부터 의장 단상을 점거해 농성에 들어간
상황이었는데,

재떨이 소동 뒤 여당은 자정 직전 야당 의원들을 밀어내고
결국 법안을 통과시켰답니다.

경부고소도로 건설에는 많은 희생도 뒤 따랐는데....

경부고속도로 최대 난공사였던 대전~대구 구간은 당재터널(옥천터널),
영동터널 등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터널 및 교량을 만들기 위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발파작업이 많았답니다.

이 과정에서 77명이 순직했고, 이들의 희생 위에 고속도로는
놓여 진 것이랍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1970년 7월 7일, 완공의 기쁨보다는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동료를 그리는 아쉬움의 눈물이 많았으며,

젊은 도로 기술자들이 부동자세로 눈물을 흘리는 동안 박정희
전 대통령도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답니다.

허브누리(www.herbnuri.co.kr) &(주)지식을 다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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