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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구문이 생겨나게 된 이유?
작성자 허브누리 (ip:)
  • 작성일 2010-09-14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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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살아서는 평지에 지은 집에서 기거했고 죽어서는 산에
만든 집인 유택(幽宅)에서 영면했는데...

그러나 조선시대 서울 도성 안에서는 이 모든 행위가 금지되었는데
지맥을 보호하고 왕권의 존엄성을 드러내려는 뜻에서였답니다.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궁궐을 굽어보는 곳에 영원히 머무를
집을 짓도록 허용할 수는 없었는데,

그래서 서울에서 죽은 사람은 모두 도성 밖으로 나가야 했답니다.

광희문과 창의문이 시체가 나갈 수 있는 문으로 지정돼 이들 문에
시구문이라는 별칭이 붙었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벼슬살이 하던 사람은 고향 땅 선산에 묻혔지만,
대대로 서울에 살던 사람들은 성 밖 가까운 곳에 묏자리를 잡았는데,

창의문을 빠져나간 시체는 애오개 주변에, 광희문을 빠져나간
시체는 남산 남사면, 용산 일대에 영원히 머물 새 집을 구했답니다.

이런 일이 500년 넘게 되풀이되면서 도성 밖 야트막한 산지는
그야말로 무덤 천지가 되었는데....

러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는 1904년 8월
용산 땅 990만㎡(300만 평)를 군용지로 수용하겠다는 뜻을
일방적으로 통고한답니다.

일제는 한국 정부에 용산 일대의 토지, 가옥, 분묘 이전비라는
명목으로 2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고,

정부는 현지 조사를 통해 농토 3118일경(日耕), 가옥 1176호,
분묘 111만7308기를 확인했답니다.

이 금액으로는 묘 1기당 보상비가 고작 10전이 되는 셈이었는데,
당시 하룻밤 숙박료가 1원이었답니다.

1905년 8월 10일 터무니없는 보상비에 집을 빼앗기고 조상의
묘를 이전해야 할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주무부처인 내부(內部)에 몰려가 시위에 돌입했지만 일본 헌병의
총칼 앞에 맥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답니다.

수백 년간 서울 시민의 공동묘지였던 용산은 이렇게 일본군 기지가
되었다가 미군에게 넘어갔고, 곧 서울 최대 규모의 공원으로
시민에게 되돌아올 예정이랍니다.

허브누리(www.herbnuri.co.kr) &(주)지식을 다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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