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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야깃거리 많은 세종대왕 묘소
작성자 허브누리 (ip:)
  • 작성일 2010-10-20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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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은 여주의
영릉에 잠들어 계시는데...

이곳은 조선의 운명을 100년이나 연장시켜 줬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영릉에서 언덕을 하나 넘으면 북벌정책을 추진했던 효종도
만나 뵐 수 있고,

두 왕릉에서 멀지 않은 능현리엔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한 비운의
명성황후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가 있답니다.

21세에 즉위한 세종이 53세로 승하할 때까지 32년간 재위를
하면서 이루어놓은 업적은 찬란한데....

정치적으론 젊은 학자들을 등용해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했으며,
조선의 자주와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측우기ㆍ해시계ㆍ물시계 등 실생활에 도움 되는 과학기구도
제작하게 했으며 군사적으로는 북쪽으로는 6진을 개척해
국토를 넓혔고, 남쪽으로는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세종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군사 등 그야말로 모든 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았답니다.

그런데 세종의 무덤은 처음엔 경기도 광주 대모산(大母山,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는데.....

원래 이곳은 터가 좋지 않았지만 세종은 세상을 떠날 때 "죽어서도
혼백이나마 부모님께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올리겠다"며 이곳에
묻히기를 원해 신하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후 파란이 일기 시작했는데, 원래 세종에겐 자식들이 많았답니다.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8대군 2공주를 비롯해 후궁과
궁인들에게서 10군 2옹주를 뒀답니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래 없는 왕실의 번창이었지만 세종의 왕위를
이어받은 문종이 2년 만에 세상을 뜨고,

그 아들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로 유배됐다가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답니다.

결국 이 사건 전후로 세종의 22명이나 되는 자식들 가운데 단 1명,
수양대군(세조)만 남고 모조리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이처럼 변고가 잇따르자 조정의 일부 대신들은 헌인릉과 함께
있는 영릉의 터가 부실한 탓이라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세조 때는 여러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1469년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답니다.

세종대왕이 새로 자리 잡은 여주 땅은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가 이미 들어와 있었는데,

세종의 왕릉지로 선택되면서 이를 옮기게 하고 세종이 들어온
일은 두고두고 민간에 화젯거리가 됐답니다.

이번엔 누가 봐도 명당이었던 모양인데...

풍수가들은 영릉의 형국을 산세가 봉황이 알을 품듯 영릉을
감싸고 있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산봉우리들이 반쯤 핀 모란 꽃송이처럼 영릉을 둘러싸고 있다는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 용이 돌아서 영릉을 쳐다본다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 칭송했답니다.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영릉을 '왕릉
중에서 제일'이라 평했답니다.

후세의 풍수가들 역시 조선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을 정도로
명당이라며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고 칭송했답니다.

그런데 2010년 10월 민주당 전혜숙 의원은 “4대강 여주보
공사로 인해 지반 침식으로 인해,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의 하나인 영릉이 훼손될 위험에
처했다”며 “세종대왕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질의했는데,
 
명당 중에 명당인 영릉이 과연 위기에서 지켜질지 많은 이들이
근심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답니다.

허브누리(www.herbnuri.co.kr) &(주)지식을 다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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